낚시의 역사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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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귀섭 작성일16-11-01 17:50 조회6,905회 댓글0건본문
제 1 절 인류 역사와 낚시
낚시의 역사는 선사시대 인류의 역사와 그 시기를 같이 한다.
선사시대 인류는 생존 수단으로서 수렵과 채집, 어로를 주로 했다. 그 중에서 구석기 시대(250만년~ 1만년 전)에는 뗀석기(=打製石器)를 이용하여 사냥을 하거나 나무 열매를 채취하는 등 주로 수렵, 채집을 통해서 먹을 것을 얻어 생존을 했고, 일부 어로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은 되나 낚시도구를 이용한 어로의 흔적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신석기 시대(1만년 ~ 6000년 전)에는 간석기(=磨製石器)를 이용하여 수렵과 농경, 목축, 어로를 병행하여 생존했다.
바로 이시기가 지금의 낚시가 시작된 시기이니, 낚시의 역사는 사냥과 더불어서 인류의 역사와 그 시기를 같이 해 왔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신석기 시대의 유적 발굴현장에서는 거의 어디에서든 패총(조개무덤)이 있는 한 낚시바늘이 출토되고 있다. 그리고 출토된 그 시대의 낚시 바늘은 비록 동물의 뼈와 돌을 사용하였기는 하나, 오늘 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현대식 낚시 바늘과 그 모양이 너무나 흡사하다. 우리나라에서도 강원도를 비롯하여, 가거도, 여서도 등 전라도 작은 섬에서까지 신석기 시대의 낚시 바늘과 당시에 낚았던 생선 뼈가 유물로 나오고 있으니 우리나라 낚시 역사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랜 낚시역사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선사유적을 분석 해 보면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낚시바늘의 형태는 시베리아 바이칼호에서 출토된 낚시바늘과 같은 형태인 이음식(결합식)낚시바늘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낚시역사뿐만 아니라 같이 출토되는 줄문토기 등과 함께 선사시대 민족 이동을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제 2 절 고대 낚시의 흔적
고대낚시는 구약성서의 예언서에 낚시에 관한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구약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나 그 사실관계를 지금에 와서 확인하기는 어렵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국 주나라 문왕 시절 강태공 여상의 낚시 일화는 그 시기가 3000년 전의 일이다. 또한 공자도 조이불망(釣而不網)이라 하여 군자는 낚시를 즐기되 그물질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으니 이는 그 시대에 이미 낚시인의 덕목을 가르친 것이라 하겠다.
이 시대에 중국에는 조차(釣車)라고 하는 낚시 도구가 이미 있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그림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오늘날의 릴과 유사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신라 4대왕 석탈해가 낚시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말 이제현의 어기만조(魚磯晩釣)와 조선시대 이현보의 어부가(漁夫歌) 등에 낚시관련 내용이 있으며, 조선 현종 11년(1670년)에 남구만의 약천집(藥泉集)에는 낚싯대, 낚싯바늘, 찌, 미끼 등 낚시도구와 기법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조선시대 정조임금은 낚시를 즐겨 하여 정승 판서는 물론 궁 내의 관료들과도 낚시를 즐겼고, 한 해에 한번은 가족까지 참석하게 하여 낚시를 즐기고 상을 내렸다고 한다. 요즈음으로 치자면 중앙정부 가족 낚시대회를 한 셈이다.
이러한 근거로 미루어 보아 낚시는 동 서양을 막론하고 선사이래 꾸준히 이어져 왔으며, 그 장비와 기법이 시대를 따라서 점진적으로 발달 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제 3 절 근대낚시의 흔적
근대 낚시의 흔적으로는 낚시관련 서적으로도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선 세계 최초의 낚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는 책은 영국의 줄리아나 버너즈라는 여성이 1494년에 출판한 책이 있으며, 현대인의 낚시 바이블이라 일컷는 조어대전(釣魚大典)은 역시 영국의 아이작 월튼이 1653년에 출판한 책이다.
중국에서는 강이나 호수 가에 조어대라는 조망대를 설치하여 시인 묵객들이 낚시를 하면서 풍류를 즐겼고, 그 모습이 많은 문헌과 그림에 남아있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말기로 들면서 낚시터에서 관료들이 휴가를 즐기면서 국사를 논하였고, 이때는 기녀들을 대동하여 큰 물고기를 낚으면 북 장구를 치면서 지화자를 노래 하였다고 전해진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우리나라 근대낚시의 자료들은 1900년경부터의 기록이 주를 이룬다.
특히 1900년대 초에 이미 한강과 대동강에서는 한 겨울 얼음낚시도 성행하였고, 그에 관한 기록이 사진과 그림으로 다 수 남아있으니 당시의 낚시가 얼마나 대중화 되었었던 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나온 낚시 이론서로는 1930년 대에 계용묵 선생이 쓴 `낚시질 독본`이 있으며, 여기에는 낚시 장비와 채비뿐만 아니라 미끼사용에 관한 내용이 충실하게 기록되어 있고, 특히 요즈음 성행하는 대물낚시를 위한 새우나 옥수수 미끼 사용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에 이미 일부 대물낚시도 즐겨 했던 것 같다.
제 4 절 현대 낚시의 변천
현대 낚시는 앞선 어느 시기보다도 급속하게 발전을 했다. 그 큰 이유는 우선 인류 생활의 향상이고, 다음이 낚시 장비의 급속한 발달이다.
ㅇ 1960년 이전
우리나라 현대낚시는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1945년을 기점으로 하여, 해방 이듬 해 봄인 1946년 4월 1일 최초로 `서울낚시회`가 창립되면서부터 활발히 이루어 졌다. 이후 1948년도에 서울 어구상 조합이 후원하는 `서울시민 낚시대회`가 처음으로 열림으로 해서 낚시 대중화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념대립의 격동기와 가난, 그리고 이어서 발발한 6.25 전쟁에 의해서 지속적인 발전을 하지 못하고 침체되었고, 한국전쟁이 휴전상태로 간 1953년 이후 다시 성행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낚시를 유난히 좋아하였다고 하며, 그와 관련된 일화는 수없이 많다. 아마 절대권력자인 대통령이 낚시를 좋아하였으니 주변 인사들이 낚시를 선호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1956년 10월 4일 한국일보사가 주최한 제 1회 전국 낚시 선수권 대회 등 전국 낚시 선수권 대회 우승자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상패를 하사한 것은 당시 주요 보도 거리였다. 특히 그 시대 자유당 소속의 국회 부의장 이었던 이재학 선생은 매주 거르지 않고 출조를 한 낚시 마니아였다. 따라서 그의 주변에는 항상 고위 관료나 정객이 낚시를 같이 하고자 했고, 이때 낚시는 조선시대의 맥을 이어서 고급 사교와 풍류로서 자리 메김을 하게 되었다.
ㅇ 1960년대
1960년 군사쿠데타에 의해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낚시분야는 다시금 쇠퇴하게 되었고, 이에 사회지도층은 눈치를 보면서 낚시를 하거나 아예 낚싯대를 접어야 했다. 다만 일반인의 낚시활동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다행인 것은 당시 계엄사령부에서 일체의 단체행동을 금지하면서도 `관광, 낚시, 소풍은 단체로 갈 수 있다`고 공식 발표하여 낚시활동의 숨통을 공식적으로 트여 준 것이다.(1964.6.12 조선일보 기사) 이것은 대민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1965년도에는 낚시단체가 중심이 된 치어방류 행사가 최초로 있었고, 낚시터 녹화사업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으며, 언론에서도 낚시관련 기사가 많이 등장했다. 그 기사의 횟수나 내용으로 보아서 아마 요즈음의 프로스포츠 기사 정도의 관심거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예를 들면 신문기사에 `올해 낚시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든가 `올해의 낚시계 전망` ` 봄 낚시터 베스트 10` 등 집중분석 기사가 그것이다.
특기 할 것은 65년 2월 21일자 신문 기사에 ` 64년 가을 서울대 최계근 교수가 들여 온 일본 헤라 붕어(떡붕어) 20마리에 대한 번식과 보급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 보아 떡붕어는 우리가 알고 있는 72년이 아닌 64년도에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이다.(그 동안은 1972년 파주의 김진근 씨가 떡붕어 수정란 400만개를 들여온 것이 최초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이때의 신문은 매주 1회 정기적으로 낚시계 소식을 다루고 있는데, 63년도부터 시작된 바다낚시 출조에 대해서도, 65년부터는 `지난 주의 낚시터`란에 그 조황 소식을 상세히 전해주고 있다.
이러한 붐을 타고 1965년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낚시회가 탄생했다. 이 여성낚시회(초대회장 우진경)는 매주 수요일에 정기 출조를 했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부낚시 대회도 열렸다.
이후 1968년도에는 릴을 이용한 `쏘가리 루어낚시`가 등장했고, `세 치 이하의 붕어 놓아주기 운동`이 있었으며, 1969년도에는 조선일보 추최로 `청룡기 쟁탈 전국 실업낚시 선수권대회`가 시작되었다.
또 1960년대 특이 사항으로는 낚시용 떡밥이 상품화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까지는 개인이 곡물을 볶아 분말화해서 사용하거나 낚시점에서 됫박으로 팔았는데, `주작`이라는 상표를 단 봉지떡밥이 최초로 등장한 것이다. 이후로 신한, 토끼표, 거북표 떡밥 등이 줄을 지어 출시되었다.
그리고 낚싯대의 재질이 고급화되어 글라스 파이버 낚싯대가 등장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글라스 낚싯대는 오리엔탈, 은성, 로얄 등이 있었다.
이렇듯이 1960년대에는 전쟁과 가난,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낚시분야만은 대중적인 인기와 발전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당시 사회지도층 사이에 낚시가 크게 성행하지 못했고, 당시 고급스포츠로 각광을 받던 테니스에 사회지도층이 집중됨에 따라서 지속적인 체계화가 이루어지지 못했음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 날에도 테니스에서 골프로 이어지면서 사회지도층의 낚시는 활발하지 못한 실정이다.
ㅇ 1970년대
1970년대 낚시계의 특징은 유료낚시터와 본격적인 얼음낚시, 그리고 고속도로 개통에 따른 원거리 출조와 보트낚시의 등장이다.
유료낚시터는 1971년 충북 진천의 초평지가 최초였고, 얼음낚시는 1900년대 초에 실시하다가 잊혀졌던 것이 본격적인 낚시 기법으로 재 등장하였으며, 고속도로를 타고 영 호남 지방으로 장거리 출조하는 낚시회가 날로 늘어갔다. 또한 1971년도에는 보트낚시가 등장했다.
ㅇ 1980년대
이 시기에 낚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통행금지 해제였다. 1982년 12월부로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자 곧 밤낚시 출조와 야간에 출발하는 장거리 출조의 붐이 일었다. 이로서 전국의 낚시터가 무박 1일의 낚시터화 되었다. 이는 낚시계의 호황으로 이어졌고, 주요 길목에 위치한 낚시점은 24시 낚시점으로 변모해갔다.
또한 카본낚싯대의 유행은 낚시장비의 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대단한 위력을 가져왔다. 그러면서 이 시기에 카본에서 하이카본, 보론, 케블러 등의 최 고급소재 낚싯대가 줄줄이 등장하였고, 이는 조구업계의 호황과 더불어 낚시의 고급화 바람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시기가 레저스포츠로서 골프가 성행하기 시작하는 시기였으므로 1980년대 후반으로 들면서부터는 다시금 낚시가 고급사교 레저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ㅇ 1990년대
이 시기는 낚시계의 위기와 기회가 병존하는 시대였다. 80년대에 급속한 발전을 보이던 낚시계는 90년대에 들어서도 그 상황을 지속하고 있었는데, 1998년도에 국가부도사태라고 말하는 IMF 위기가 왔다. 이로써 국가경제는 온통 쑥밭이 되었고, 기업은 줄줄이 부도가 나서 실업자가 거리에 넘쳤다. 이때 일부에서는 실업자가 하릴없이 마음을 추스릴 겸 낚시를 할 것이므로 낚시계는 더 없는 호황을 누릴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표면 적으로는 낚시 인구가 늘어나는 듯 했지만 사실은 덧없이 돈 쓰고 물가에 나가 낚시를 할 만한 정신적, 금전적 여력도 없었다.
그러나 다니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명예퇴직을 당한 낚시꾼들이 낚시꾼 증가 기대 심리와 생활 유지에 대한 궁여지책으로 낚시점을 개업하기 시작하여 이 시기에 낚시점 숫자는 급속히 불어났다.
아마 이 시기에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는 다수의 방황하는 백성을 우리 낚시계가 잘 흡수하였다면 낚시계 발전에 큰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ㅇ 2000년대
2000년 대는 낚시의 문화시대를 열었다. 그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낚시 전문 방송이다. 교통관광방송 리빙TV에서 최초로 낚시프로그램을 송출하여 호응을 얻었고, 이어서 낚시전문 방송인 FS-TV가 개국하여 24시간 낚시 방송을 제작하여 송출하였으며, 다음으로 한국낚시채널 FTV에서 자체 제작한 낚시 프로그램을 24시간 방송하고 있다.
또한 인터넷 낚시 관련 사이트가 수백 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전국의 거의 모든 낚시인이 어느 사이트에든 가입하여 활동 할 정도로 활발한 운영을 하고 있다.
또 하나 이 시기의 특징적인 사건은 낚시의 프로화 시대 개막이다. 경기낚시가 활성화 되면서 조구업체를 중심으로 해서 소속사에 프로 낚시 팀을 두게 되고, 여기에서 활동하는 프로 선수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러한 경기낚시는 민물과 바다로 구분하여 진행되며, 국내 경기뿐만 아니라 세계낚시 월드컵을 창설하여 60여개국이 참가하는 대회를 매년 회원국을 순회하면서 개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활발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조구업체를 비롯한 낚시계가 아직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낚시의 역사는 선사시대 인류의 역사와 그 시기를 같이 한다.
선사시대 인류는 생존 수단으로서 수렵과 채집, 어로를 주로 했다. 그 중에서 구석기 시대(250만년~ 1만년 전)에는 뗀석기(=打製石器)를 이용하여 사냥을 하거나 나무 열매를 채취하는 등 주로 수렵, 채집을 통해서 먹을 것을 얻어 생존을 했고, 일부 어로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은 되나 낚시도구를 이용한 어로의 흔적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신석기 시대(1만년 ~ 6000년 전)에는 간석기(=磨製石器)를 이용하여 수렵과 농경, 목축, 어로를 병행하여 생존했다.
바로 이시기가 지금의 낚시가 시작된 시기이니, 낚시의 역사는 사냥과 더불어서 인류의 역사와 그 시기를 같이 해 왔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신석기 시대의 유적 발굴현장에서는 거의 어디에서든 패총(조개무덤)이 있는 한 낚시바늘이 출토되고 있다. 그리고 출토된 그 시대의 낚시 바늘은 비록 동물의 뼈와 돌을 사용하였기는 하나, 오늘 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현대식 낚시 바늘과 그 모양이 너무나 흡사하다. 우리나라에서도 강원도를 비롯하여, 가거도, 여서도 등 전라도 작은 섬에서까지 신석기 시대의 낚시 바늘과 당시에 낚았던 생선 뼈가 유물로 나오고 있으니 우리나라 낚시 역사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랜 낚시역사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선사유적을 분석 해 보면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낚시바늘의 형태는 시베리아 바이칼호에서 출토된 낚시바늘과 같은 형태인 이음식(결합식)낚시바늘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낚시역사뿐만 아니라 같이 출토되는 줄문토기 등과 함께 선사시대 민족 이동을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제 2 절 고대 낚시의 흔적
고대낚시는 구약성서의 예언서에 낚시에 관한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구약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나 그 사실관계를 지금에 와서 확인하기는 어렵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국 주나라 문왕 시절 강태공 여상의 낚시 일화는 그 시기가 3000년 전의 일이다. 또한 공자도 조이불망(釣而不網)이라 하여 군자는 낚시를 즐기되 그물질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으니 이는 그 시대에 이미 낚시인의 덕목을 가르친 것이라 하겠다.
이 시대에 중국에는 조차(釣車)라고 하는 낚시 도구가 이미 있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그림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오늘날의 릴과 유사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신라 4대왕 석탈해가 낚시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말 이제현의 어기만조(魚磯晩釣)와 조선시대 이현보의 어부가(漁夫歌) 등에 낚시관련 내용이 있으며, 조선 현종 11년(1670년)에 남구만의 약천집(藥泉集)에는 낚싯대, 낚싯바늘, 찌, 미끼 등 낚시도구와 기법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조선시대 정조임금은 낚시를 즐겨 하여 정승 판서는 물론 궁 내의 관료들과도 낚시를 즐겼고, 한 해에 한번은 가족까지 참석하게 하여 낚시를 즐기고 상을 내렸다고 한다. 요즈음으로 치자면 중앙정부 가족 낚시대회를 한 셈이다.
이러한 근거로 미루어 보아 낚시는 동 서양을 막론하고 선사이래 꾸준히 이어져 왔으며, 그 장비와 기법이 시대를 따라서 점진적으로 발달 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제 3 절 근대낚시의 흔적
근대 낚시의 흔적으로는 낚시관련 서적으로도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선 세계 최초의 낚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는 책은 영국의 줄리아나 버너즈라는 여성이 1494년에 출판한 책이 있으며, 현대인의 낚시 바이블이라 일컷는 조어대전(釣魚大典)은 역시 영국의 아이작 월튼이 1653년에 출판한 책이다.
중국에서는 강이나 호수 가에 조어대라는 조망대를 설치하여 시인 묵객들이 낚시를 하면서 풍류를 즐겼고, 그 모습이 많은 문헌과 그림에 남아있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말기로 들면서 낚시터에서 관료들이 휴가를 즐기면서 국사를 논하였고, 이때는 기녀들을 대동하여 큰 물고기를 낚으면 북 장구를 치면서 지화자를 노래 하였다고 전해진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우리나라 근대낚시의 자료들은 1900년경부터의 기록이 주를 이룬다.
특히 1900년대 초에 이미 한강과 대동강에서는 한 겨울 얼음낚시도 성행하였고, 그에 관한 기록이 사진과 그림으로 다 수 남아있으니 당시의 낚시가 얼마나 대중화 되었었던 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나온 낚시 이론서로는 1930년 대에 계용묵 선생이 쓴 `낚시질 독본`이 있으며, 여기에는 낚시 장비와 채비뿐만 아니라 미끼사용에 관한 내용이 충실하게 기록되어 있고, 특히 요즈음 성행하는 대물낚시를 위한 새우나 옥수수 미끼 사용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에 이미 일부 대물낚시도 즐겨 했던 것 같다.
제 4 절 현대 낚시의 변천
현대 낚시는 앞선 어느 시기보다도 급속하게 발전을 했다. 그 큰 이유는 우선 인류 생활의 향상이고, 다음이 낚시 장비의 급속한 발달이다.
ㅇ 1960년 이전
우리나라 현대낚시는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1945년을 기점으로 하여, 해방 이듬 해 봄인 1946년 4월 1일 최초로 `서울낚시회`가 창립되면서부터 활발히 이루어 졌다. 이후 1948년도에 서울 어구상 조합이 후원하는 `서울시민 낚시대회`가 처음으로 열림으로 해서 낚시 대중화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념대립의 격동기와 가난, 그리고 이어서 발발한 6.25 전쟁에 의해서 지속적인 발전을 하지 못하고 침체되었고, 한국전쟁이 휴전상태로 간 1953년 이후 다시 성행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낚시를 유난히 좋아하였다고 하며, 그와 관련된 일화는 수없이 많다. 아마 절대권력자인 대통령이 낚시를 좋아하였으니 주변 인사들이 낚시를 선호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1956년 10월 4일 한국일보사가 주최한 제 1회 전국 낚시 선수권 대회 등 전국 낚시 선수권 대회 우승자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상패를 하사한 것은 당시 주요 보도 거리였다. 특히 그 시대 자유당 소속의 국회 부의장 이었던 이재학 선생은 매주 거르지 않고 출조를 한 낚시 마니아였다. 따라서 그의 주변에는 항상 고위 관료나 정객이 낚시를 같이 하고자 했고, 이때 낚시는 조선시대의 맥을 이어서 고급 사교와 풍류로서 자리 메김을 하게 되었다.
ㅇ 1960년대
1960년 군사쿠데타에 의해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낚시분야는 다시금 쇠퇴하게 되었고, 이에 사회지도층은 눈치를 보면서 낚시를 하거나 아예 낚싯대를 접어야 했다. 다만 일반인의 낚시활동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다행인 것은 당시 계엄사령부에서 일체의 단체행동을 금지하면서도 `관광, 낚시, 소풍은 단체로 갈 수 있다`고 공식 발표하여 낚시활동의 숨통을 공식적으로 트여 준 것이다.(1964.6.12 조선일보 기사) 이것은 대민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1965년도에는 낚시단체가 중심이 된 치어방류 행사가 최초로 있었고, 낚시터 녹화사업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으며, 언론에서도 낚시관련 기사가 많이 등장했다. 그 기사의 횟수나 내용으로 보아서 아마 요즈음의 프로스포츠 기사 정도의 관심거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예를 들면 신문기사에 `올해 낚시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든가 `올해의 낚시계 전망` ` 봄 낚시터 베스트 10` 등 집중분석 기사가 그것이다.
특기 할 것은 65년 2월 21일자 신문 기사에 ` 64년 가을 서울대 최계근 교수가 들여 온 일본 헤라 붕어(떡붕어) 20마리에 대한 번식과 보급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 보아 떡붕어는 우리가 알고 있는 72년이 아닌 64년도에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이다.(그 동안은 1972년 파주의 김진근 씨가 떡붕어 수정란 400만개를 들여온 것이 최초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이때의 신문은 매주 1회 정기적으로 낚시계 소식을 다루고 있는데, 63년도부터 시작된 바다낚시 출조에 대해서도, 65년부터는 `지난 주의 낚시터`란에 그 조황 소식을 상세히 전해주고 있다.
이러한 붐을 타고 1965년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낚시회가 탄생했다. 이 여성낚시회(초대회장 우진경)는 매주 수요일에 정기 출조를 했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부낚시 대회도 열렸다.
이후 1968년도에는 릴을 이용한 `쏘가리 루어낚시`가 등장했고, `세 치 이하의 붕어 놓아주기 운동`이 있었으며, 1969년도에는 조선일보 추최로 `청룡기 쟁탈 전국 실업낚시 선수권대회`가 시작되었다.
또 1960년대 특이 사항으로는 낚시용 떡밥이 상품화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까지는 개인이 곡물을 볶아 분말화해서 사용하거나 낚시점에서 됫박으로 팔았는데, `주작`이라는 상표를 단 봉지떡밥이 최초로 등장한 것이다. 이후로 신한, 토끼표, 거북표 떡밥 등이 줄을 지어 출시되었다.
그리고 낚싯대의 재질이 고급화되어 글라스 파이버 낚싯대가 등장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글라스 낚싯대는 오리엔탈, 은성, 로얄 등이 있었다.
이렇듯이 1960년대에는 전쟁과 가난,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낚시분야만은 대중적인 인기와 발전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당시 사회지도층 사이에 낚시가 크게 성행하지 못했고, 당시 고급스포츠로 각광을 받던 테니스에 사회지도층이 집중됨에 따라서 지속적인 체계화가 이루어지지 못했음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 날에도 테니스에서 골프로 이어지면서 사회지도층의 낚시는 활발하지 못한 실정이다.
ㅇ 1970년대
1970년대 낚시계의 특징은 유료낚시터와 본격적인 얼음낚시, 그리고 고속도로 개통에 따른 원거리 출조와 보트낚시의 등장이다.
유료낚시터는 1971년 충북 진천의 초평지가 최초였고, 얼음낚시는 1900년대 초에 실시하다가 잊혀졌던 것이 본격적인 낚시 기법으로 재 등장하였으며, 고속도로를 타고 영 호남 지방으로 장거리 출조하는 낚시회가 날로 늘어갔다. 또한 1971년도에는 보트낚시가 등장했다.
ㅇ 1980년대
이 시기에 낚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통행금지 해제였다. 1982년 12월부로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자 곧 밤낚시 출조와 야간에 출발하는 장거리 출조의 붐이 일었다. 이로서 전국의 낚시터가 무박 1일의 낚시터화 되었다. 이는 낚시계의 호황으로 이어졌고, 주요 길목에 위치한 낚시점은 24시 낚시점으로 변모해갔다.
또한 카본낚싯대의 유행은 낚시장비의 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대단한 위력을 가져왔다. 그러면서 이 시기에 카본에서 하이카본, 보론, 케블러 등의 최 고급소재 낚싯대가 줄줄이 등장하였고, 이는 조구업계의 호황과 더불어 낚시의 고급화 바람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시기가 레저스포츠로서 골프가 성행하기 시작하는 시기였으므로 1980년대 후반으로 들면서부터는 다시금 낚시가 고급사교 레저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ㅇ 1990년대
이 시기는 낚시계의 위기와 기회가 병존하는 시대였다. 80년대에 급속한 발전을 보이던 낚시계는 90년대에 들어서도 그 상황을 지속하고 있었는데, 1998년도에 국가부도사태라고 말하는 IMF 위기가 왔다. 이로써 국가경제는 온통 쑥밭이 되었고, 기업은 줄줄이 부도가 나서 실업자가 거리에 넘쳤다. 이때 일부에서는 실업자가 하릴없이 마음을 추스릴 겸 낚시를 할 것이므로 낚시계는 더 없는 호황을 누릴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표면 적으로는 낚시 인구가 늘어나는 듯 했지만 사실은 덧없이 돈 쓰고 물가에 나가 낚시를 할 만한 정신적, 금전적 여력도 없었다.
그러나 다니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명예퇴직을 당한 낚시꾼들이 낚시꾼 증가 기대 심리와 생활 유지에 대한 궁여지책으로 낚시점을 개업하기 시작하여 이 시기에 낚시점 숫자는 급속히 불어났다.
아마 이 시기에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는 다수의 방황하는 백성을 우리 낚시계가 잘 흡수하였다면 낚시계 발전에 큰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ㅇ 2000년대
2000년 대는 낚시의 문화시대를 열었다. 그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낚시 전문 방송이다. 교통관광방송 리빙TV에서 최초로 낚시프로그램을 송출하여 호응을 얻었고, 이어서 낚시전문 방송인 FS-TV가 개국하여 24시간 낚시 방송을 제작하여 송출하였으며, 다음으로 한국낚시채널 FTV에서 자체 제작한 낚시 프로그램을 24시간 방송하고 있다.
또한 인터넷 낚시 관련 사이트가 수백 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전국의 거의 모든 낚시인이 어느 사이트에든 가입하여 활동 할 정도로 활발한 운영을 하고 있다.
또 하나 이 시기의 특징적인 사건은 낚시의 프로화 시대 개막이다. 경기낚시가 활성화 되면서 조구업체를 중심으로 해서 소속사에 프로 낚시 팀을 두게 되고, 여기에서 활동하는 프로 선수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러한 경기낚시는 민물과 바다로 구분하여 진행되며, 국내 경기뿐만 아니라 세계낚시 월드컵을 창설하여 60여개국이 참가하는 대회를 매년 회원국을 순회하면서 개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활발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조구업체를 비롯한 낚시계가 아직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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